곤수곡인 비문 해석
1990
작성자
ilgwando
작성일
2018-03-20 09:42
조회
3015
일관도(一貫道)를 한국(韓國)에 개황(開荒)한 전인(前人) 김복당(金福堂)의 행적비(行蹟碑)
전현(前賢)의 휘(諱:이름)는 복당(福堂)이고 성(姓)은 김씨(金氏)인데 계통은 경주(慶州)에서 나왔으며 시조(始祖)는 알지(閼智)이니 본래 신라(新羅)의 왕족(王族)으로 삼십칠대(三十七代) 왕(王)을 거쳤다. 공(公:복당)의 13대조가 국사(國事)로써 중국(中國)에 사신으로 가서 인하여 그 곳에 거주하였다.
부친의 휘는 관성(官成)이고 모친은 원씨(袁氏)인데 세 번째 아들로 중화민국(中華民國) 하북성(河北省) 무읍현(武邑縣) 동북쪽의 금몽춘(金蒙村)에서 출생하니 즉 서기 1914년 갑인(甲寅) 10월 14일이고 음력으로는 8월 25일 오시(午時)생이다.
9세에 사숙(私塾:서당)에서 공부하였고 후에 천진(天津) 하북(河北)의 큰 거리에 위치한 중배(中培)중학교를 졸업하고 남개대학(南開大學)에서 철학과(哲學科)를 졸업하였다.
25세에 강의불당(剛毅佛堂)에서 구도(求道)하고 34세에 백양기(白楊期)의 2대(二代)조사이신 천연고불(天然古佛)의 명령을 받들고 이어서 조국(祖國)에 돌아가 전도(傳道)하면서 진도(眞道)와 진법(眞法)으로 조국의 은혜에 보답하리라 발심하였다.
이에 명사(明師:사존)와 도장(道長), 노전인(老全人)들 면전에서 홍서대원(洪誓大愿)을 세우고 조국(祖國)에 가서 개황(開荒)할 것을 맹세하여 마친 후에 배를 타고 상해(上海)의 자광불당(紫光佛堂)에 이르러 유숙하다가 다행히 김은선(金恩善)의 장형 은충(恩忠)씨가 한국 교포를 소개함에 힘입어 조국에 돌아오게 되었다.
난민선(難民船)을 타고 부산에 이르러 배에서 내려 기차를 타고 경성(京城:서울)에 이르러 명동여관(明洞旅館)에 머무른 지 10여일 후에 약간의 사람을 제도시켰고 상왕십리(上往十里)의 어느 한 가정을 빌려 작은 불당(佛堂)을 세워 몇 사람을 제도하고 구도시켰다. 그 후에 손동태(孫東泰)의 부인 이순애(李順愛)가 구도하고 인보(引保)하면서부터 점점 한국동포(同抱)에게 도(道)를 전하게 되었다.
맨 처음의 개황(開荒)은 부산에서 하였고 수개월 후에 전주(全州), 이리(裡里) 방면에 가서 개황(開荒)하고 후에 경성(京城)에 돌아올 때는 마침 12월 중순이라서 하얀 눈이 수척(數尺)이나 내리니 매일 걸어 다니면서 사람을 제도하고 그 이듬 해 초에 이천(利川)읍내에 가서 중화관(中華館)을 운영하는 이광승(李光昇)을 구도하고 불당(佛堂)을 세웠으며 또 이경현(李庚炫)의 집에 이르러 불당(佛堂)을 세우고 사람을 제도하였다.
또한 경성(京城)에서 산해루(山海樓)를 운영하는 조문향(曹文鄕)의 후원(後園) 창고를 빌려 불당(佛堂)을 세우고 반기(班期)를 열어 성전(成全)시켰고 후에 또 부산에 가서 손회장(孫會長) 형제를 제도하였다.
그 후에 중국(中)과 한국(韓)이 서로 분리하자는 설이 있었으니 이 때에 화교(華僑) 도친들은 도장(道場)을 떠나고 닦지 않은 자가 다수였다. 도덕기초회(道德基礎會)가 두 파로 나누어졌으니 이는 곧 삼개도단(三壇)이 합일(合一)하자는 계획이 이루어지지 못함으로 인한 여파로 전국의 도무(道務)는 문득 모래처럼 흩어져 수습(收拾)할 방법이 없었다.
다행인 것은 대구(大邱)의 한점사(韓点師) 부부가 힘을 돕고 신통역(申通譯)이 말을 통역하는 책임을 담당하여 풍(風:팔풍)을 무릅쓰고 판도(辦道)하고 공공(公共)불당을 순회하면서 성전시킨 지 20년 만에 드디어 원상(原狀)으로 회복시키게 되었다.
충무로(忠武路) 법단(法壇)이 너무 협착하여 능히 판도(辦道)할 수가 없으므로 매각하고 흑석동(黑石洞) 현재 장소로 옮겨 이른 후에 도무(道務)가 점점 발전함에 이르렀다. 노모님단(老母壇) 3층을 신축한 후에 이어서 4층 강당(講堂)과 아울러 노전인(老前人)의 방옥(房屋)과 후관(後館)까지 완성한 연후에 어두운 방에 밝은 등불을 비춘 것처럼 세상을 교화하고 사람을 깨우고 세도(世道)를 구원하여 건지고 인심(人心)을 구원하여 바르게 하고 점차적으로 세계가 대동(大同)이 됨에 이르게 하니 요천(堯天)과 순일(舜日)의 시대(태평성세)를 가히 당시에 볼 수 있게 하니 이는 곧 현재 세상의 전 인류가 갈망하는 바로서 그간에 겪은 만반의 장애는 붓이나 말로서 다 표현가기 어렵다.
그러나 덕(德)이 있는 자는 반드시 이웃이 있다 하였으니 도장 중에 존사중도(尊師重道)하는 점전사(点傳師), 단주(壇主) 그리고 성심(誠心) 도친이 한 덩어리로 뭉쳐서 도무(道務)에 대해 돕고 힘쓰고 있으니 현재 아주(亞洲)의 각국 중에서 오직 우리 한국의 도반(道盤)이 가장 크게 발전하여 날마다 나가고 달마다 자라고 있는 것은 완전히 노전현(老前賢)의 노심(勞心)과 초사(焦思), 그리고 천신(千辛)과 만고(萬苦)에도 백번 꺾여도 굽히지 않는 백절불굴(百折不屈)의 충천(沖天)하는 대지(大志)를 힘입어 그렇게 된 것이다.
그러나 피로가 누적되어 병(病)이 되고 눈으로 사물을 보지 못하고 발로 걸음을 걸을 수 없음에 이르렀으니 이것은 하늘이 시험(試驗)하고 사람이 시험(試驗)하는 진도(眞道)에 진고(眞考)라 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장씨(張氏)에 장가를 들어 사남(四男)을 낳았으니(따님은 제외함) 장자는 수신(樹新), 차자는 수인(樹仁), 삼자는 수영(樹榮), 사자는 수화(樹華)이다. 국제적으로 정치(政)가 서로 다르고 장벽이 가로 막혀 서로 왕래가 없으니 음성과 서신(音信)이 묘연하지만 멀지 않은 장래에 가히 안부를 접하게 되지 않겠는가?
스스로 곤수곡인(昆水谷人:混俗)이라 이름 한 것은 그가 세속에 섞여(混)있다는 이유를 이른 것이다.
신미(辛未)년 음력 1월 25일에 홀연히 수족(手足)을 열어 보게 하였으니 세간에 누리신 나이는 78세이다. (엄계수족(奄啓手足)이란 뜻은 공자제자인 증상(曾參)이 임종 시에 문인을 불러 모이게 하고 자신의 손과 발을 열어 보였으니 이는 내가 부모님께 한점도 부족함이 없이 온전히 받은 신체를 나 역시 조금도 훼손함이 없이 돌아가야 그것이 부모님에 대한 효란 것을 가르치기 위하여 나온 말이다.)
도형(道兄)이신 이기호(李基昊)씨가 전현대인께서 전도(傳道)하는 내력을 수습하여 와서 나에게 비문(碑文)을 요청하기에 나는 본시 문장이 보잘 것이 없으나 굳이 사양하지 못하고 감히 대강 줄거리를 기록함이 이상과 같이 이를 뿐이다.
서기 1991년 해의 차례는 신미년 음력 2월 5일에 건립하다.
후학(後學) 이돈우(李敦雨)가 찬(撰)하고 후학(後學) 송기영(宋基英)이 근서(謹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