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방 후 17대 조사인 김공조사는 미륵고불 화신이시고 백양초조(白陽初祖)이시다. 이름은 로중일(路中一)이고 호는 통리자(通理子)이며 산동 제령(山東濟寧) 사람으로 자칭 무선치인(無線痴人)이라 하셨다. 청 도광(道光) 29년(1849년) 4월 24일에 태어나 중화민국 14년(1925년) 2월 2일 향년 76세로 귀공 하셨다. 어린 시절에 양친을 모두 잃고 여동생 하나와 서로 의지하며 제령성 오리영의 두 칸짜리 낡은 집에서 지냈을 정도로 생활이 매우 고생스러웠다.
청나라 동치(同治) 9년(1870년)에 정부에서 병사를 모집하며 가족의 생계비를 주었으므로 22세 때 직예 병참에 입대하였다가 청 광서 21년 2월 초순 경 3일 동안 밤에 계속 꿈속에서 “너는 네가 해야 할 일을 해야 한다. 속히 산동 청주로 가서 청허노조(淸虛老祖)를 찾아 구도하여라. 속세에 탐련해서는 안 된다.” 라는 노모(老中)의 계시를 받고 군대를 떠나 그동안 모아둔 은 백량을 챙겨 남쪽으로 길을 떠났는데 도중에서도 꿈속에 계속 신불이 갈 길을 인도해 주었다.
어느 날 “내일 ○○산으로 명사를 찾아가 구도를 하라.”는 계시를 받았는데 그날 밤 16대 조사 유조(劉祖)도 꿈에 “내일 아침 큰 현인이 올라 올 것이니 산 앞에 나아가 맞이하라.”는 신불의 계시를 받고 아침 일찍 일어나 산 앞에 나아가서 사방을 둘러보며 기다렸다. 키가 작고 뚱뚱한 사람이 큰 모자에 남루한 옷차림으로 봇짐을 메고 다가오고 있었다. 유조는 보기에 별로 특이한 점이 없었으므로 “바로 이 사람인가?” 하고 의심하고 있는데 가까이 다가와 “이곳에 구도하는 곳이 있습니까?” 하고 물었다. “당신이 구도하려고 하오? 구도하려면 은 백량을 내놔야 하오.” 하고 유조가 대답하자 서슴없이 “백량이라면 백량을 드리지요. 저는 꼭 구도를 하겠습니다.” 하였다.
유조는 이 사람이 진정으로 구도를 하고자함을 알고 산위에 있는 불당으로 데리고 갔는데 당도하자마자 로조는 봇짐을 풀고 서슴없이 은 백량을 꺼내어 두 손으로 바치었다. 유조는 속으로 ‘방금 내가 백량을 달라고 한 것은 장난삼아 무심코 한 말인데 이 사람은 진담으로 알고 이러는구나!’ 생각하고는 즉시 향초를 준비하여 현관 일규를 지점하였다. 구도를 끝내고 유조는 “도를 당신에게 이미 전하였으니 돌아가시오.” 하자 “제가 오랫동안 군대생활을 하면서 모아둔 은 백량을 모두 선생님에게 바쳤습니다. 저는 돌아갈 집이 없습니다. 선생님을 따라 수도하기를 원합니다.” 하였다.
유조는 은 백량을 받았기에 그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어 “그대는 무엇을 할 줄 아오?” 하고 물었다. “저는 글을 몰라 궂은 일 밖에 할 줄 모릅니다.” “그러면 나무를 해오고 물 긷는 일을 하시게.” 하여 힘든 일을 해가며 수도하기 시작하였다. 학식이 있는 제자들은 법당에서 성리심법을 연구하고 참선을 하는데 학식이 없는 로조는 매일 나무하고 밥을 지으며 오랫동안 고행을 하였다. 1898년 로조의 나이 50세에 이르렀을 때 유조는 이미 노쇠하여 누구에게 도통(道統)을 이어주어야 할지 고심하다가 천단(天壇) 앞에 의식을 갖추고 가르침을 청하였다.
노모(老中)께서 훈시하시길 “대현(大賢)은 바로 눈앞에 있다.”고 하였다. 유조는 그 뜻을 모르고 “그 사람이 누구입니까?” 하고 다시 물으니 “만약 미륵이 어디 있느냐고 묻는다면 곡강지(曲江池) 안을 자세히 보아라. 머리에는 양털 모자를 쓰고 몸에는 속인의 옷을 걸치고 입을 열면 진실한 말을 하고 항상 인의(仁義)를 베풀고 있느니라. 눈을 뜨면 두 갈래로 갈리고 중간에 일점의 기(機)가 있으며 일월이 합하여 명감(明鑑)이 되니 사람마다 손에 들고 있다.”고 훈시하였다. 그래도 유조는 그 뜻을 깨닫지 못하고 다시 “그 사람이 누구입니까?” 하고 물으니 “때가 이르지 못해 그대에게 말하기가 어렵다.” 하므로 속으로 ‘그 사람이 누구인가?’ 하고 생각하다가 갑자기 무엇을 깨달은 듯 모든 제자들에게 손을 씻고 소향하게 하였다. 그리고 불전에서 모두 두 손을 펴게 하고 누구의 손금이 합동(合同) 두 자로 되어있는가를 검사해 보았다. 그러나 어느 제자의 손금에 합동 두 자가 없었다. 유조가 한참 생각에 잠겨있을 즈음 로조가 주방에서 손을 깨끗이 씻고 나와 불당으로 달려와서 “제 손에 있나 봐 주세요.” 하자 “자네가 있을 리 있겠는가?” 하고 잘 살펴보지 않았다.
얼마 후 유조는 대중들에게 “나는 이미 늙어 도운(道運)이 쇠퇴하여 이곳을 더 이상 유지해 나갈 수 없으니 각자 천명(天命)을 받들어 갈 길을 찾아 해산하라.”고 하자 제자들은 할 수 없이 각기 짐을 챙겨 하산하여 집으로 돌아가거나 개황에 나섰다. 홀몸인 로조는 돌아갈 집이 없어 고향 산동 제령의 여동생이 생각나 그곳으로 가기로 하고 여동생의 소재를 힘겹게 수소문하여 찾아갔으나 20 여 년 동안 서로 만나지 못한 까닭에 서로 알아보지를 못하였다.
로조가 어린 시절 어려웠던 생활과 남매가 마을 앞에서 야채를 줍던 일들을 이야기하자 비로소 남매임을 확인하였다. 이때 로조의 여동생은 이미 진씨 집에 출가하여 흥륭(興隆) ․ 흥해(興海) 두 아들이 있었고 남편은 우둔한 편이라 생활이 넉넉하지 못하였다. 다시 함께 살며 수도와 전도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불당을 설치하여 중생을 제도하기 시작하였다. 도무가 날로 번창해지자 두 생질도 도무를 돕게 되었다. 그들은 큰 진선생과 작은 진선생으로 불렸다.
광서 31년(1905년) 로조는 정식으로 계명(乩命 : 선불의 지시)에 의해 17대 조사가 되었다. 로조는 평생 결혼을 하지 않았으며 민국14년(1925년) 귀공 시 수천 명의 제자가 있었고 수제자가 8명이 있었다. 귀공 후에 김공조사(金公祖師)로 봉해졌다.